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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창운] 신월의 밤 - 1

격하게 사랑한다. 적요



신월(新月)의 밤(夜)


# 0.

차가운 밤바람이 볼을 스치며 머리칼을 길게 휘날린다. 발 아래로 보이는 대지는 어둠에 묻혀 까마득하게 가라앉아 꿈틀거린다. 긴 속눈썹을 지그시 내리 감고 바람을 받는 몸은 금시라도 아래로 추락해 버릴 것만큼 가녀리다. 진야(眞夜)는 아슬아슬한 외당 옥개(屋蓋)의 용마루 위에 서서 밤을 느꼈다. 그녀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눈앞에 존재하는 남자는 더욱이나.

“야심한 시각입니다. 예서 무얼 하고 계시온지요.”
“그대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그의 기척을 감지하고 그녀가 올라오고 난 이후에도 한참이나 묵묵히 술병을 기울이던 그는 냉랭하게 관여를 배제하였다. 일언에 무시당했음이 분명할진대, 진야는 입가에 녹아들 듯한 웃음을 띠었다. 범인이라면 일신을 어지간하게 단련하지 않으면 운신은커녕 오르기도 힘들 높이건만, 일개 무희가 소리도 기척도 없이 유유히 그의 곁에 다가옴에도 그는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무언의 침묵으로 그녀를 철저히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었다. 그럼에 진야는 즐거웠다.
고고히 홀로 앉아 어둠 속에 휘감겨 있는 그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은은한 붉은 빛을 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천천히 보다 자극적으로 쓰다듬으며 앞으로 손을 옮겼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머리칼로 가려진 등의 근육을 하나하나 느끼고 더듬으며 허리를 지난 손은 자연스럽게 겉깃의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뜨거운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와 닿아 부드럽게 훑었다. 약간은 눅눅한 옷깃을 헤치며 아직 땀이 채 식지 않아 끈적한 습기가 묻어나는 가슴 위를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기어갔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는 진야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자기로 빗어진 주병(酒甁)을 빼앗아 들었다. 그제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다봤다. 은근한 노기가 담겨 있는 그 눈빛에 진야의 가슴이 저릿저릿하게 저려왔다. 아아, 정말이지 최고야, 이 검고 붉은 눈동자는. 바짝 타오르는 갈망에 메마른 입술을 훔친 것도 모를 정도로 진야는 그와의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진야.”
“우후훗, 그리 허면 이런 건 어떠실지요.”

진야는 입에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입 속 가득 독한 저급 독주의 주향(酒香)이 따갑게 확 풍기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그녀는 그대로 적요의 입술을 덮었다. 입과 입이 맞물리고 혀와 혀가 엉키며 누런빛의 술이 타고 내려와 인후로 흘러내려갔다. 목울대를 움직여 그가 술을 삼키자 그녀는 그의 입가에서 목덜미를 타고 가슴께까지 흘러내려 그녀의 손가락까지 적신 술의 행로를 따라 혀로 핥아 내렸다. 여전히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채로 입술을 내리던 그녀는 목 언저리에서 깊은 숨을 토하며 머물렀다. 역동하는 혈류가 쿵쾅거리는 경동맥을 통하여 얇은 피부 아래로 한 치의 여과 없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성적인 흥분을 느끼지 못하느니 만큼 피에 대한 유혹은 그 무엇보다도 이미 한 번 멈췄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만든다.
이대로 물어 버리면 끝이 난다.
목덜미를 물어뜯고 분수처럼 치솟아 오를 피를 흠뻑 들이마시고 마음껏 적셔지고 싶은 흥분에 그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자신의 피로 물든 그의 창백한 모습은 필시 비견할 자가 없을 만큼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리라.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을 테지. 이 붉고 아름다운 동공이 열려가며 그녀의 모습이 영원히 담겨지는 것은 어떠한 희열을 안겨줄까. 마지막의 순간에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은 그? 아니면 나?
구체화되어 가는 즐거운 상상에 진야는 아쉽게 입을 떼었다. 상상은 상상에서 그쳐야 즐거운 법. 아아, 그래 아직은 때가 이르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힘이 들어갔는지 생긴 작은 생채기에서 약간 배어나온 피 한 방울을 핥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의 몸에서 독한 주향과 더불어 풍겨오는 향은 다행히도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 주었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습니다만… 땀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격하신 움직임 뒤의 술은 과히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함께 섞인 이 향은 여인의 분내음은 아니로군요. 성인의 남성, 아마도 이공자(二公子)…창운(蒼雲)님이 아닌지요.”
“사냥개처럼 냄새 잘 맡는 게 장기라 하여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라면 저잣거리에 나가서 사람을 모아라. 그대만한 가희가 나선다면 푼돈깨나 쥐어줄 게다.”
“어머, 야속도 하시어라. 이대로 소첩을 내치 실 생각이옵니까?”
“내 언제 내당에 너를 들인 적이 있기라도 하였단 말이더냐.”
“그리 말씀하시면 섭지요. 소첩의 작은 가슴은 이리도 대공자(大公子)를 향한 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요.”

그는 차갑게 웃었다.

“정욕을 풀어 줄 상대는 너만 있는 것이 아니지.”
“허나 아직까지 대공자의 잠자리를 데워드리고 있는 것은 소첩이옵니다.”

진야는 쿡쿡 웃으며 다시 그에게 입을 맞췄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목줄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아찔한 소름이 돋는 전율을 즐기는 것은 짜릿한 쾌감마저 가져왔다. 지극히 오만하고 차가우며 흉맹한 성정을 가진 그.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 잔혹한 그가 그 성정만큼이나 도도하고 요사스럽기까지 한 수려한 용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여와(女渦)의 짓궂은 손장난 탓이련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공유하는 그는 잿빛으로 굳어진 심장을 뛰어 움직이게 하는 최고의 흥분제였고, 이미 예전에 마모되었다고 생각한 소유욕이라는 감정까지 강렬하게 움직이게 하는 최상의 자극제였다.
적요(赤妖). 실로 더할 나위 없이 그에게 적격인 명(名)이 아니던가.
덧없이 짧은 인간의 생을 다하고 스러져 보내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깊은 눈매가 한 곳을 바라 볼 때면 언뜻언뜻 스쳐가는 광기와 집착이 그녀는 만족스러웠다. 그도, 그녀와 같은 동류인 것이다.

“여기서 이쯤하고 꺼져라. 한 밤에 여자와 지붕 위에서 교합하다 떨어져 죽었다는 아둔한 작자로 기록되는 건 사양이다.”
“적요님과 함께 생을 끝낼 수 있다면 그보다 기꺼운 일은 없지요.”
“정히 그 명을 단축시키고 싶다면 내 친히 끊어주마.”
“후훗…적요님은 절대 소첩을 죽이실 수 없답니다.”
“시험해 볼 테냐?”
“그런 말씀 하시면 무섭습니다.”

진야는 말과는 다르게 순순히 그의 몸에서 물러섰다. 그녀는 절대 성급하게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얌전하게 과실이 무르익어 떨어지는 때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적요와 자신은 결국에는 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가 감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끝에 공멸이 시커먼 암흑의 아귀를 벌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녀의 순리요, 적요의 명(命)인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자살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지도 모를 만큼, 지붕의 비탈진 면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서 있던 그녀는 조용히 몸을 숙여 적요에게 인사를 고하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어둠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진야가 물러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적요는 거의 다 벗겨지다 시피 해서 등 뒤로 흘러내린 상의를 추슬러 입었다. 그녀의 부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등 뒤로 와 닿는 공기가 차갑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사갈 같은 계집.”

적요는 나직하게 씹어뱉듯이 중얼거리며 다시 병을 들어 입가에 가져왔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 1.

―푸드드드득!!
난데없는 침입자들로 인한 소요에 산새들이 일제히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고요하던 숲의 정적은 사냥감을 쫓는 침입자의 외침과 사냥감을 뒤쫓는 사냥개의 소란으로 일시에 깨져 버렸다. 그리고 그 선두에 한 필의 말이 있었다.

“이봐! 이 쪽으로 몰아오라구!”
“벌써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버렸어.”
“쳇, 아쉽네. 모처럼 실한 놈이었는데.”

암사슴이 도망친 반대쪽은 깎아지른 듯한 단애가 있는 곳이다. 갑자기 산맥이 꺾여져 방심하다가 실족사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에 오죽하면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귀문애(鬼門崖)라 하겠는가. 사슴 한 마리를 쫓자고 목숨까지 버릴 수는 없었기에 도성 근처의 산에 사냥을 나온 귀공자들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누가 봐도 탐낼 만한 사냥감을 놓친 것이 아쉬워 한 남자가 혀를 쯧쯧 찼다. 저 놈만 잡아 간다면 콧대 높은 화월루(華月樓)의 연홍(燕紅)에게 큰 소리 치며 자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는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때 곁을 스치며 말을 달려 나가는 이가 있었다. 사냥을 위해 머리 높이 가볍게 틀어 올린 머리끈이 춤추듯 눈앞을 지나는 것을 일순간 멍하게 바라보던 그는 불현듯 놀랐다. 언뜻 눈에 비친 오만한 입매와 자신만만하게 빛나던 눈동자를 가진 이는 일행 중 단 하나 뿐이다.

“대공자!!”

기겁한 일행들이 목청껏 부르는 것도 상관 않고 말을 달려 나간 적요는 똑바로 사슴이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잠시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던 일행들은 무언의 약조를 하고 사라진 적요의 뒤를 따랐다. 자칫하다가 대공자의 신변에 불의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격노한 대공(戴公)의 손에 의해 그들의 목이 달아날 것임은 자명하니.

적요는 사슴을 쫓으며 말안장에 매두었던 활을 들어 겨누었다. 무성하게 자란 거친 풀과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사슴은 본능적으로 사냥꾼에게 불리한 방향과 위치로 도주하고 있었다. 근처에 절벽이 있다는 것은 적요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추격전을 벌이다가는 잠깐의 방심으로도 충분히 그 아래로 추락할 것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위험하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며 쉽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더욱 존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차갑다. 무섭게 지나가는 나뭇잎과 자잘한 나뭇가지들이 얼굴에 남기는 가느다란 생채기는 오히려 추적자의 희열을 돋운다. 곧 모든 걸 소유하게 될 정복자의 유희.
즐겁다. 적요는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죽 웃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아. 결코. 이 손에 그 무엇이 남는다 하여도.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놓아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활이 허공을 날았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사냥감이 반동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명중했다는 것을 적요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감각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동그라지는 사슴의 위에 ‘그’가 투영된다. 설혹 시신으로 남을지라도 벗어날 수 있을 성 싶은가. 너는 나로 인해 오롯이 되는 것이다.
사냥꾼의 관습대로 적요는 아직 숨이 붙어 꿈틀거리는 사슴의 목을 단도로 주욱 내리그었다. 동맥이 끊어져 샘솟듯 솟아오르는 피를 사발에 담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후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피가 식도를 타고 꿀럭꿀럭 흘러내려갔다. 그렇게 한 사발을 비웠을 때 쯤에야 비로소 허겁지겁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대공자! 무사하셨습니까?”

대답대신 적요는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핥았다. 오늘의 사냥은 비교적 만족스럽다.





차라리 고양이라도 되어서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고 싶을 정도로 나른한 봄날이었다. 아침나절부터 서고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 있던 창운은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수마를 쫓으려 했으나, 으레 그렇듯이 덮쳐드는 수면욕구에서 벗어나기는 역부족이었다.

‘으음, 한식경 정도만 자고 일어날까? 어차피 형님이 사냥에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졸린 마음에 쉽게 자기정당화를 이룬 창운은 곧바로 서궤(書几)에 엎드려서 달콤한 오수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운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한식경은커녕 저녁놀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낮과는 다르게 스물스물 올라오는 한기에 몸을 가볍게 떨다가 스스로가 흠칫 놀라서 잠에서 깬 창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찌릿찌릿하게 저려오는 팔의 저림에 혀를 깨물고 다시 주저앉았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잠이 들었길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찌르르한 팔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옆에 적요가 없다는 것 정도가 다행이려나. 그가 있었다면 픽 웃으면서 손수 쥐가 난 팔을 세게 때려주는 수고 정도는 마다하지 않았을 터이니.

“형님의 그런 고약한 점은 아버님과 똑같다니까. 아들은 아비를 꼭 빼닮는다는 말이 그르…음?”

저린 팔을 붙들고 끙끙거리던 창운의 시야에 문득 붉게 물든 저녁놀을 받으며 창가에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에 낯선 여인이었다. 옷차림을 보아서 궁비(宮婢)는 아닌 듯 한 여인이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밤의 한 자락을 베어 온 듯한 풍성한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리며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창운은,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깊은 어둠의 빛을 간직한 눈동자가 차분히 창운을 응시했다. 창백한 피부위에 도드라진 핏빛 입술이 길게 호를 그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그려냈다. 가지런한 치아가 입술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듯 했을 때 여인은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쏟아지듯 길게 흘러내리고, 여인의 모습은 어둠 속에 녹아 사라졌다.
창운은 아픔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달음에 여인이 있던 곳까지 뛰어가서 허공을 더듬었다.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맙소사… 허깨비에라도 홀린 건가?”

식은땀이 목 언저리를 촉촉이 적셨다. 심장이 요동쳤다. 인간인지 요귀인지 꿈이 보여준 허상인지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창운은 가슴 언저리를 꽉 눌렀다.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움직이며 허공에 그려진 여인의 존재를 증명했다. 피가 몰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숨이 가쁘게 치밀어 올라 창운은 쓰러지듯이 벽에 기대어 앉았다. 차가운 벽에 뺨을 대고 있자 조금은 진정이 된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볼 수 있었던 여인의 모습은 가히 화용월태(花容月態)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단순히 미색에 홀렸다고 하기에는 처음 겪는 이 가슴의 울림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혹스러워하면서 창운은 숨을 골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들썩이던 가슴은 진정이 되었다. 창운은 얕은 한숨을 쉬면서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가시지 않는다.

몸이 허공에 둥실 떠 노니는 듯한 혼몽한 상태로 창운은 서고를 나섰다. 두 팔 가득 죽간을 안고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그의 망연한 정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건 발끝에 무언가가 걸린 느낌이었다.

“우왓!”

넘어진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곧이어 닥쳐올 충격에 대비하여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뜬 창운은 강인한 팔이 자신의 가슴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반색했다.

“형님! 사냥에서 돌아오신 겁니까?”
“아아…….”

어깨를 으쓱한 적요는 동생을 안고 있는 그대로 고개를 대강 성의 없이 끄덕였다.

“예상보다 일찍 귀가하셨군요. 오늘은 멀리까지 나간다고 하시더니…그래, 수확은 어떤가요?”
“음. 큼지막한 암사슴 한 마리와 작은 들짐승 몇 마리를 잡았지. 그보다 아운(阿雲). 예서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잘 걷고 있는 사람의 발을 고의로 걸었다고는 일절 여기지지 않는 태도로 적요는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꿈에도 이를 짐작하지 못하는 창운은 약간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해명했다.

“별건 아니고요… 그저 춘풍에 취하여 다소 날연해 졌나 봅니다. 생전에 보지도 않던 헛것을 봐 버렸으니.”
“호오, 헛것이라고? 그리도 기가 쇠한 줄 알았다면 아까 잡은 사슴의 선지라고 가지고 올 걸 그랬군.”
“헛것은 헛것이지만 금세라도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듯한 여인을 보았으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창운은 쑥스럽게 웃었다. 여인을 보았다는 말에 적요의 긴 눈썹이 휘어졌으나 별다른 내색 없이 창운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한걸음 물러섰다.

“방으로 가지고 가던 것이었나?”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흐트러진 죽간들을 하나씩 주워 들자 창운도 다급히 그를 따랐다. 주섬주섬 죽간을 챙긴 창운은 성큼성큼 긴 다리를 들어 걸음을 옮기는 적요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뒤쫓았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상경(上卿) 기홀(忌忽)의 여식과 혼담이 있다지요?”
“그런 소문에는 또 재빠르군.”

마뜩찮은 기색으로 적요는 낮게 중얼거렸으나 앞서 가는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이에 관한 담화는 사양하겠다는 뜻이 명백히 드러나는 태도였으나 창운은 모르는 척 하고 다시 뒤따라갔다.

“궁비들에게 듣자하니 상경의 여식은 어린나이에 모친을 여의긴 하였으되, 상경의 가르침이 엄격하고 반듯하여 규중에 몸을 감추었음에도 그 청염(淸艶)한 자태와 음전한 성품이 담을 넘어 궁까지 전해질 정도이니 흠잡을 데가 없더라며 칭송이 자자하더이다. 이번에는 아버님의 뜻을 물리치지 마시고 혼담을 받아들이십시오. 언제까지 홀몸으로만 계실 생각입니까.”

적요는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겨 창운의 처소까지 걸어갔다. 궁비가 황망히 문을 열어주자 그는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가 창운의 서궤 위에 가지고 온 죽간을 내려놓았다. 평소와는 다른 쌀쌀맞은 적요의 태도에 다소 머쓱해진 창운은 죽간을 정리하며 농처럼 가볍게 말을 던졌다.

“아버님과 어머님도 장성한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나이 이립(而立)이 가까워지도록 손자 한 명을 보지 못한다면서 여간 탄식하시는 게 아닙니다. 형님이 얼른 혼인을 하셔야….”

창운은 적요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제도 내자(內子)를 맞아들여 가정을 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요는 빙글 몸을 돌려 서궤 맞은편의 창을 활짝 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그가 노한 것은 아닌지 창운이 조심스레 기색을 살피는 게 보였다. 나른한 춘풍이 가볍게 머리칼을 흩날렸고, 적요는 창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여인이라. 혼인이라. 언제까지 거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창운도. 그렇다 하여도 쉽사리 창운을 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죽여 갈기갈기 찢어서 모든 걸 남김없이 씹어 삼킨다면, 이 지독한 갈망이 해결 될 수 있을까.
활짝 열린 격자무늬의 창을 타고 비쳐 들어오는 적금빛의 햇살이 얼굴에 부서져 내렸다. 눈이 부신 듯, 약간 찌푸린 눈가를 타고 서산으로 막 넘어가기 시작하는 저녁놀의 색이 흘렀다. 유난히 흰, 어린아이와 같은 그것의 젖빛의 얼굴은 은은한 붉음과 금빛으로 물들이는 노을과 어우러져 어렴풋하지만 몽환적인 기이한 부유감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異相)의 환영.
두근― 심장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적요는 손을 들어 쓰다듬듯 창운의 머리로 가져갔다. 살랑 춤추듯 흐느적 머리끈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단정히 틀어 올려 묶은 머리칼이 차르륵 흩어지며 얼굴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적요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들어 가볍게 숙인 입가로 가져왔다.

“……형님?”

의문을 담은 창운의 작은 호명에 적요는 가만히 들어올린 머리칼에 천천히 한 올, 한 올 입 맞추는 것으로 대신했다. 더없이 경건하리만큼 느껴지는 지순한 입맞춤.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느릿느릿하지만 정성스러운 적요의 입맞춤이 끝났을 때, 짙은 군청색의 머리칼들은 적요의 손가락을 타고 허무하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래. 너는 그것이지. 가득 움켜잡은 손의 틈새로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는 모래알처럼. 그 손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 너를 죽여 육신 한점, 피 한 방울까지 모두 나의 것으로 한다 하여도. 결코.

“…아운.”

가없는 벽(碧)의 빛. 너는, 나의 기다림이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꿈을 위해 끝없는 허무를 쫓는다. 바스라지는 환영의 잔상을 부둥켜안으면, 그 순간 덮쳐오는 허망과 거짓의 영속(永續). 단지, 굴절되고 뒤틀린 어두운 집착과 소름 끼치도록 선열한 소유욕의 욕망만 존재할 뿐. 이 꿈을 깨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너를 영원히 내 곁에 존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머릿속에 마음속에 혼에 너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에 나를 각인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아운.”

다시 한 번 아까보다 분명한 소리로 적요는 창운의 이름을 되뇌었다. 낮게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에 창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을 스쳐 이마와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가없다. 가지런한 눈썹을 지나 반듯한 눈매와 단정한 콧잔등을 어루만지며 얇은 입술을 더듬는다. 가끔씩 그의 형은 이렇게 뜻 모를 행동을 종종 한다. 익숙해질 만도 되었건만 언제나 처음처럼 낯설기만 한 감각에 창운은 곤혹스러웠다.
기이할 만큼 적막한 고요를 깨트린 것은 밖에서 들려온 궁비의 음성이었다.

“대공자. 이공자. 속히 차비를 차려 듭시라는 명이 있으셨사옵니다.”

적요는 스르륵 손을 거두었고 창운은 몰래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럴 때의 형은 언제나 버겁고 무거웠다.

“얼른 채비를 갖추십시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늦장을 부린대서야 흥이 덜하질 않겠습니까.”

창운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고, 적요는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창 밖을 보았다. 오늘은 대공의 적장자이자 공위(公位)를 승계할 후계자인 적요의 나이 스물일곱해가 되는 날이었다.



+)
적요창운 연재.. 일까나? 3, 4년 전에 쓰던 글을 찾아내고 삘을 받은 김에 슥슥 추가해서 올립니다. 옛날에 쓴 부분은 어디어디고, 지금 쓴 부분은 어디어디 일까요. 맞히시는 분께 저의 러브리 샤이닝 뽑뽀를! (처맞는다)

실제의 대나라는 춘추 초기에 멸망한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글의 배경은 대애충 춘추 말 전국 초. 고증도 대애애애충 기억나는데로 (무책임①)
신월야라니 제목이 너무 건방지잖아 (무책임②)
건실한 총각 창운이 지금은 형아에게 고분고분하게 존대도 하고 있지만 나중에 빡 돌면 반말 찍찍 까면서 형아한테 대들겠지염 (무책임③)
원래 적요, 창운은 진마의 진명이겠지만...대충 합시다 (무책임④)
진명이 한자이름이니까 중국 사람 맞겠졈? (무책임⑤)

이건 뭐 거의 오리지널이라서 송구;
저는 적요창운도 좋지만 적요진야도 좋아염
홈에는 완결나면 한꺼번에 올리든지.. 하고 --;

여튼 짧게 짧게 갑니다

by 비원랑 | 2006/11/29 03:46 | ├ 月夜幻談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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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zero at 2006/11/29 04:11
ㅇ<-<..................살려...........................................................비원랑님!!!!!!!!!!!!!!!!!!!!!!!!!!!!!!!!!!!!!!!!!!!!!!
Commented by D-cat at 2006/11/29 04:53
하아........(소녀의 자그만한 이 신음소리~^^:)
Commented by 에바 at 2006/11/29 07:48
저도 적요진야 좋아요 므흐흐. 적요창운이야 뭐 오피셜이고(..)
이 글 예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비원랑님께서 쓰신 글이셨군요!! 언제 봐도 참 멋져요;ㅁ;/
Commented by 마유 at 2006/11/29 09:37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글이 참으로 유려하외다..(라고 말투 슬쩍 차용;;) 하아 비원랑님 넘흐 좋아요.ㅜㅜ 뭔지 모르는 사람까지도 빨아들이시다니.(웃음)
Commented by 령하 at 2006/11/29 11:01
헉 저 창운 엄청 조아하는데ㅠㅠㅠㅠ완갑입니다 아주 크흑T_T 진짜 너무 좋아요!! 두고두고 먹어도 좋겠ㅇ<-<
Commented by 이슈비케 at 2006/11/29 12:13
비원랑니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비원랑님을 따라갈래요. 속편도 어서엇!!! 동양적인 분위기와 어휘들도 너무 좋고! 농염한 적요님과 진야도 좋고! 사랑스러운 창운도 좋고ㅠ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됩니다ㅠㅠ 이 비장한 남자들이 흡혈귀가 되는 과정, 그리고 형제애, 진야 누님의 광기+_+
Commented by at 2006/11/29 21:17
우와, 저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거 맞지요.T▽T 막 감격의 육수가 얼굴구멍으로 좔좔 흐르구요,
어서 다음편을 쓰시란 말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상에, 저런 적요창운이라니- 제가 격하게 언니를 사모해요, 이래서.ㅠㅠㅠ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6/12/05 23:54
zero/ 헉 왜 그러세요 제로님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답삭)

D-cat/ 아하하..^^;

에바/ 혼자만의 망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적요진야는 에로틱한 느낌이 들어요 -//- 막 적요가 여자한테 차였다는 것도 너무 웃기고!! (야)
헉. 예전에 읽으셨던 적이 있군요. 아코 부끄러워라 ㅠㅠㅠㅠㅠㅠㅠㅠ

마유/ 월야환담이라는 판타지 소설 패러디입니다 ^^; 제 베스트 커플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ㅠㅠ! 아유,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해요 ㅜㅜㅜㅜㅜ (ㅌㅌㅌ)

령하/ 형님의 애타는 스토킹을 몰라준 둔한 남자 T^T!(<-) 몇 편 될 것 같지도 않지만 끝까지 달려보겠습니다 ㅜㅜ!

이슈비케/ 아니 이슈비케님 말씀이 더 멋지십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과분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ㅠㅠㅠ 진야가 형제들 사이에서 밀고 땡기기를 잘해야 할 텐데 말이어요 ;ㅁ;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가 뭐 뻔한 것이고... (털썩)

엘베/ 응응. 아마 웹에 올린것도 2년만일까나? ;ㅁ; 아하하. 덧글에 힘입어 쓰고 있는 중 ㅠㅠ! (<-시험기간임;) 읽어줘서 고마워. 진짜 ;ㅁ;
Commented by 연아 at 2006/12/07 00:14
비원랑님 사랑합니다(와락) ㅠㅠ
할 말이 없습니다bbb 최고예염 ㅠㅠㅠㅠㅠ 월야에 대한 갈증을 이렇게 풀어주시다니^ㅁ^
적요창운+적요진야인가요 진야 너무 섹시해요 ㅠㅠ 이래서 누님이 좋아 ^ㅇ^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6/12/10 03:41
연아/ 아잌호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제 머릿속에 있는 진야의 이미지는 도도하고 요염한 여왕님이라서요 (자폭) 오나전 오리지널로 가고 있어서 괴롭습니다...orz
적요창운+적요진야+창운진야일지도요...;;;;;;;
Commented by 히나기쿠 at 2007/05/06 14:29
.....아, 아 이런 착하신 분 ㅠㅠㅠㅠㅠㅠㅠ!!!! 완소입니다! 완소네요 ㅠㅠㅠ<네이버에서 기어들어와 폭주중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7/05/08 22:09
히나기쿠/ 헉 이건 뒷편도 안 쓰고 늴리리야 뒹굴고만 있는데 감상 덧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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