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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프롤로그

나는야 언제나 자급자족. 잇힝~



-prologue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것 정도는 식후의 소화를 위한 가벼운 운동만으로 족하며, 고귀함과 강력함을 뜻하는 이세상의 모든 형용사를 앞머리에 수식하는 드래곤 로드 카르제니하이아스는 고아한 입술을 열어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지간하면 내 집에서 좀 꺼져 주지 않겠나?”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것 정도는 조금 과한 운동을 한 셈 치며, 한때 전 대륙을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던 대마도사 아젤라이다는 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워 책을 보고 있는 방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싫어요.”

손가락 하나를 까닥하는 것만으로 아젤이 보고 있는 책을 빼앗은 로드는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는 책의 제목을 보고 짧은 침음성을 삼켰다. 『사랑을 노래할 바에야 나에게 빠져라!』 척 봐도 시중에 흔히들 굴러다니는 빨간딱지 3류 로맨스 소설책. 로드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불거져 오르고 화르륵 불이 붙은 책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아래로 흩날렸다.

“아앗… 아직 다 못 읽은 책인데!!”

언제 나태하게 퍼져 있었냐는 듯이 잽싸게 뛰어와서 바닥에 흩어진 재를 쓸어 모으는 궁상맞은 아젤의 등짝을 발로 걷어차버릴까, 라는 달콤한 유혹에 로드는 잠깐 흔들렸으나 만물의 가장 위대한 지배자이자 관조자인 드래곤 로드의 체면을 생각하여 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그도 아젤이 잿더미에 시간을 되돌리는 궁극마법과 복원마법을 함께 시전하려는 모습을 보고 더는 묵과할 수가 없었다. 인간형으로 폴리모프 하였을 때에는 마법을 쓰는 것 보다 육체 쓰기를 더 즐겨하는 로드의 힘이 담긴 발길질에 아젤은 시동어를 뱉기도 전에 레어의 천장으로 튕겨 나갔고, 바닥에 곤두박질치기를 바란 로드의 기대와는 다르게 허공에서 몸을 가누어 안전히 침대 위로 안착했다. 마법사 주제에 체술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지, 저건. 로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픕니다. 로드.”

부루퉁한 말투와는 다르게 멀쩡한 얼굴로 아젤은 몸을 툭툭 털어냈다.

“내 오랜 시간 참으로 많은 인간을 보아왔다만, 너같이 인생을 무가치하게 소비하는 인간은 처음 본다.”
“그게 저의 인간으로써의 아이덴티티입니다.”
“드래곤으로써의 나의 아이덴티티는 너를 당장 이 레어에서 내보내라고 말하고 있군.”
“그럴 수가!! 벌써 마음이 식으신 건가요? 전 당신의 사랑 하나만을 믿고 그 오랜 시간을 인내해 왔는데 이제 와서 절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리시다니!! 이래서 남자의 약속은 침대를 벗어나면 끝이라고 하는 거군요…!”

어디서 났는지 손수건 하나를 질끈 깨물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양새가 제법 능숙해 보인다.

“…….”
“안 통하는 군요. 쳇.”

그럼 정말 통하리라고 생각을 한 거냐, 로드는 아젤을 해부하여 뇌구조를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각설하고, 네가 내 레어에게 머문 지 오늘로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글쎄요. 늙어 가다 보니 기억력이 감퇴되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로 정확히 231년 74일째다. 200년이 넘게 무위도식하는 날백수 하나를 먹여 살려 줬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가?”
“날백수라니요…! 제가 이래 뵈도 인간 세상에서는 짠- 하고 이름 날린 위대하신 대마도사라 이겁니다!”

로드의 눈에는 겨우 한낱 인간의 존재에 불과하겠지만요… 조그맣게 궁시렁 덧붙이는 목소리가 밉지 않다.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억눌러 짐짓 엄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럼 어디 잘나신 대마도사이신 네 하루 일과를 말해보라.”
“그야 뭐어… 아침에 일어나면 식량창고에서 대충 아침 차려서 먹고, 늦게 일어나면 아침은 거르고 점심 먹고… 침대에서 책이나 보다가, 낮잠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고…… 그, 그래도 가끔씩 산 아랫마을로 산책도 나갑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켕기는 구석이 많았던지 아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것이 231년 74일동안의 네 모습이다. 그리고 난 자아를 갖춘 지적 생물체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과거는 기준에 두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내 눈에 비치는 현재지.”

한마디로 너 백수 맞아. 불로와 영생을 획득한 위대하신 대마도사 아젤라이다는 침묵했다.

“이백여년 동안 내 레어에서 인간이 나태하게 굴러다니는 모습을 더 이상 묵과하지는 않겠다.”
“자, 잠깐만요!!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신 겁니까! 그것이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로드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밖으로 내칠 기세이자, 아젤은 다급하게 ‘이날 까지도 잘 놀고먹었는데 앞으로는 왜 놀고먹으면 안 되느냐.’라고 뻔뻔한 질문을 완화시켜 백수로써의 마인드를 피력했다.

“앞서 말한 이유도 있지만, 슬슬 수면기에 접어들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수면기를 맞은 드래곤의 레어에 감히 다른 생물체가 주거하는 것을 용납할 성 싶으냐.”
“…혹시 레어를 방비할 가디언 하나는 필요 없으십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한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간절하게 물어오는 아젤의 눈빛공격을 콧웃음 한번으로 무시한 로드는 허공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이전.”

깔끔 명료한 시동어와 함께 금색 마법진이 아젤의 머리위에 죽죽 그어지고 하얀 빛의 포말이 그를 감싸 안았다. 다급해진 아젤은,

“로드! 고백할 것이 있는데, 사실 제 뱃속에는 로드의 아이가…!!”

…따위의 치졸하고 구질구질한 외침을 늘어놓았으나 곧 그마저도 새하얀 빛 속으로 완전히 감춰졌다. 그리고 그 빛이 허공의 한 점으로 사그라졌을 무렵에는, 외침의 여운도 사라져 있었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겨우 레어 바닥에서 뒹굴뒹굴 게으르게 굴러다니던 인간 하나만이 사라졌을 뿐인데 그의 레어는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카르제니하이아스는 아젤라이다가 머무르고 있던 작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전체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딱딱한 동굴 바닥에서는 도저히 못 자겠다며 아랫마을에서 사서 짊어지고 온 작은 침대, 마법을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어설픈 솜씨로 대충 나무를 잘라 만든 작은 책장과 탁자. 가끔씩 마을 구경을 나설 때 사 오곤 했던 옷가지 몇 점과 자질구레한 장식품들. 하나하나에 아젤라이다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그의 기억이 스며 있었으며, 그의 숨결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뚜벅뚜벅, 발소리마저도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방을 나온 카르제니하이아스는 입구에서 봉인 마법을 걸었고 작은 방의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닫혀졌다. 동굴 벽에 길게 몸을 기대며 카르제니하이아스는 눈을 감았다.

“기다리고 있으마. 아젤라이다.”



***



‘몹시도 무료하구나.’

닌슈르는 성의 없이 말을 몰아서 풀밭을 지나가며 하품했다. 황실의 사냥터라는 것이 대개 그러하듯 사나운 맹수들은 일절 배제되어 있으며 그나마 있는 사냥감들도 몰이꾼들이 죄다 몰아서 황제의 근처에 대령한다. 안전한 곳에 말을 타고 앉거나, 혹은 조금 숲 언저리로 말을 몰아 활 사위만 몇 번 당기면 끝이니 사냥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내일은 궁신들 몰래 잠행이라도 나가 볼까나.’

아니면 차라리 낚시라도 하는 게 정신수양에 도움이 될 지도. 아니야, 역시 잠행이 좋겠어. 그 술집에 새로 온 아가씨가 무척 아름답다고 하니 한 번 만나보고 싶군. 심심한 나머지 그런 영양가 없는 상상들을 하며 천천히 말을 몰아가던 닌슈르가 막 연못가를 지나칠 때였다. 수면의 1m정도 되는 곳에서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갔고 곧 이어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썅! 기왕 떨어…읍푸!!”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소리는 짧은 욕설만 남기고 물 속으로 꼬르륵 잠겼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근위기사들이 순식간에 닌슈르의 곁으로 달려왔으나 닌슈르는 손을 옆으로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솟아오른 한 남자는 거의 개헤엄에 가까운 수영으로 간신히 못가로 헤엄쳐 나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씨발. 나 헤엄 못 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잖아!! 이 망할 비만 도마뱀!!”

남자는 몸 아래는 반쯤 물에 잠겨 있는 채 못 가의 풀들을 쥐어뜯으며 엎드려서 누구를 향하는 지 모를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한 근위기사가 칼끝으로 그를 건드리자 그는 욱해서 고개를 들었다.

“뭐야?! 어떤 놈이 어르신 심기를 건드…려?”

자신에게 향해진 병사들의 창끝을 그제야 목격하고, 정확히 목울대에 겨눠진 검도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무섭다거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아닌 몹시도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에 짜증을 내는 얼굴이었다.
아하하하핫! 닌슈르는 이마를 짚으면서 대차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의 신하들이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보는 것도, 남자가 ‘저 놈은 또 뭐야. 대낮에 실성이라도 했나.’ 라는 얼굴로 보는 것도 모른 채 닌슈르는 실로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이거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아.’

남자의 존재는 무료한 일상에 던져진 하나의 조약돌이었다.



***



하다못해 허공에서 떨어트려 줬으면 부유 마법이라도 썼을 텐데 하필이면 연못 위에서 정확히 1m되는 지점으로 이동시켜 놓는 바람에 마법을 쓸 시간도 없이 볼썽사납게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게다가 하필이면 재수 없게 가장 근처에 있던 놈이 황제였다니. 덕분에 아젤은 ‘황제 시해 미수’ 라는 터무니없는 죄명이 붙은 채로 지하 감옥에 갇혀 버렸다. 세상에 그렇게 멍청한 암살자가 어디 있단 말이더냐!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규정지어 버린 아젤은 자죄감에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밖의 간수가 조용히 하라며 윽박질렀으나 아젤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벽 한 쪽에 붙은 나무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마법사라고 의심을 했는지 -사실 맞았다- 손목에 마력 구속구를 채워놓긴 했지만, 아젤이 마음만 먹는 다면 감옥 밖에서 빠져나가는 것 따위, 굳이 탈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조용히 입 닥치고 수감 생활을 며칠 째 견디고 있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식사다.”

작은 식기 투입구가 열리고 쟁반에 담긴 음식들이 창살 안으로 들어왔다. 벌떡 일어난 아젤은 냉큼 쟁반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랬다. 그가 얌전히 감옥 안에 있는 이유는 매끼 나오는 식사가 매우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돈 많은 제국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이상한 곳에서 감탄을 하며 아젤은 오늘도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만끽했다. 책을 볼 수 없다는 점만 뺀다면, 어차피 로드의 레어에 머무르고 있을 때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생활을 했으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하다 못해 늘어지는 감옥 안에서의 생활이 열흘째 되던 날, 만사태평한 아젤도 명색이 황제 암살자인 자신에게 문초 한번 없다는 것이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마침내 호출이 있었다.

“수감번호 J-201. 밖으로 나와라.”

드디어 문초와 함께 하는 고문의 시작인 건가. 아젤은 분위기를 보다가 여차하면 튀어버릴 요량으로 슬렁슬렁 간수가 끄는 대로 독방의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열흘 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는 그다지 틀린 것도 없었다. 대충 따라가다가 분위기가 험악해 지면 적당히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상황은 전혀 의외로 돌아갔다. 꽤 오랫동안 계단을 올라 지하 감옥에서 벗어난 아젤은 곧 간수에게서 젊은 시녀의 손에 인계되었고, 그녀를 따라 깔끔한 욕실로 안내 되었다. 거기까지만 그를 안내하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한 쪽에는 깔끔한 새 옷이 개켜 있었고, 따뜻한 김까지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욕탕을 본 아젤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거 여기서 씻고 나오란 소리인가?’

열흘 동안 지하 감옥에서 노닐던 동안에 그렇게 많이 더러워 졌나 싶어서 아젤은 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가 느끼기에 별 이상은 없었다. 아젤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에 옷을 훌훌 벗고 욕탕 속으로 몸을 풍덩 담궜다. 문초 받으러 가는 절차 치곤 참 거창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레어에서 지내고 있을 동안은 마을까지 내려가지 않는 이상 근처의 못에서 몸을 대강 씻는 것이 전부였으니 제대로 한 번 목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두어 시간 동안 느긋하게 있으면서 구석구석 몸을 씻은 아젤이 새 옷을 대충 꿰어 입었을 즈음, 딱 맞춰서 시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아무 말 없이 시녀는 다시 그를 안내했고, 아젤은 영문도 모르고 그녀를 졸졸 따라갔다. 대륙에서도 으뜸가는 나라답게 황성의 외궁임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함과 웅대함은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들 정도였지만, 이보다 더 큰 황궁을 박살 낸 전적이 있는 아젤은 시큰둥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3층까지 올라간 시녀는 작은 방의 앞까지 그를 인도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아젤이라도 그를 심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문 앞까지 데려 왔다는 것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거겠지? 어차피 인간이 만든 상황치고 그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를 구태여 함정에 빠트릴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아젤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문을 밀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아젤은 작은 방을 한번 휘 살펴봤다. 예상했던 대로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방이었다. 방 가운데의 탁자에 앉아서 책을 보며 쿠키를 먹고 있던 남자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아. 드디어 왔나. 날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그대가 처음이야.”

아젤은 한 눈에 그를 알아보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밥을 주는 사람에게는 친절하자는 것이 그의 생활 모토중의 하나였다.

“도중에 욕실로 안내하지만 않았더라도 좀 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것 같군요. 폐하.”

제국의 지배자, 리샬 닌슈르 쿤 베르덴뷔트는 예상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상황 파악할 정도쯤은 되었습니다.”
“사실은 지난 열흘 동안 그대가 암살자가 아니라고 신하들을 설득하느라 꽤나 애 먹었어. 그 열흘도 자네를 기다린 시간이라고 쳐두지.”

황제는 손짓으로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고, 황제에 대한 예의나 황공함 따위는 갖추지 않은 아젤은 겸양도, 황제의 은혜에 대한 입바른 말도 하지 않은 채 냉큼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닌슈르는 다시 크게 웃었다.

“재미있군. 짐의 앞에서 그대 같이 행동하는 자는 보지 못하였어. 예의가 없다 못해 무례할 지경인데도 그대는 참으로 유쾌하구만.”

나도 감옥 따위에 갇힌 건 처음 겪는 경험인데 말이야. 아젤은 저절로 튀어나올 뻔 한 대꾸를 속으로 꾸욱 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잘만 하면 몸 편안히 놀고먹을 기회를 다시 가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

“그대는 짐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나는 자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불공평하군. 어디 한번 소개를 해보게.”
“아젤라이다라고 합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습니다.”
“아젤라이다…?”

앗차, 이름을 말한 순간 아젤은 금방 후회했다. 불과 2,300여 년 전에 공포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자신의 이름이다. 인간은 망각하는 생물이며 짧은 생을 누린다 허나, 그들에게는 세대로 이어지는 기억과 기록이 있다. 의혹을 사게 하는 본명을 말 하여서는 안 되었을 것을. 아젤은 무심코 본명을 말한 자신을 책망하며 황제가 의심을 가진다면 ‘아버지가 젊었을 때 한때 마법의 길에 잠깐 몸을 담은 탓에 대마도사 아젤라이다를 동경하여 아들을 낳자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라는 변명을 0.3초 만에 생각해내었다.

“여자 이름이잖아. 특이하군.”
“아버지가 젊었을 때… 아…하하하하하……. 그게 아니라… 제가 어렸을 때 호되게 큰 병을 앓은 적이 있어서 부모님이 악마가 아기를 데려가지 못하게 액땜을 하려고 여자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로드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작명의 진실을 이런 식으로 말해 버렸다. 젠장. 아젤은 남몰래 피눈물을 흘렸다. 빌어먹을 부모님은 왜 하필이면 저런 다소곳한 여자이름을 생각해 내신 거냔 말이다.

“그런 풍속이 있었나? 이제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액땜방식 이야.”
“엄~~청 시골에서 태어났었거든요.”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태어났을 때는 있었단 말이다. 빌어먹을.

“그러면 아젤라이다라고 부르면 되겠군.”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름을 입 속에서 굴러보는 닌슈르에게 아젤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죄송하지만 그냥 아젤이라고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쁜 이름을 왜 줄여서 부르라고 말하나?”
“저기,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이 좀….”
“아하. 알겠네. 이름이 여성스러워서 고민이었던 거군?”
“하하하…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닌슈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까지 가볍게 맞부딪쳤고, 아젤은 다시 한번 이미 백골이 진토 되어 넋도 사라지고 없는 부모에게 수백, 수천 번은 더 했을 원망을 속으로 퍼부었다.

“좋아. 그럼 앞으로 아젤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황제는 즐거운 듯 웃으며 아젤에게도 다과를 권했다. 깊은 커피 향에 아젤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닌슈르는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는 잘 할 수 있는 게 뭐지? 황실의 마법사들이 침 튀기며 말하던 것처럼 마법사라도 되는 건가?”

아젤은 손목의 구속구를 한 번 내려다보고 황제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마지막을 본 뒤에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마법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마법사라고 인정했다가는 앞으로 매우 귀찮아 진다. 그리고 쿠키는 꽤 맛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째서 그날, 그런 식으로 등장했지?”

볼썽사납게 연못으로 곤두박질 쳐서 개헤엄으로 헤엄쳐 나왔나― 라고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젤은 닌슈르에게 조금 고마워했다. 그에 대한 변명은 열흘 동안 할일 없이 지내며 생각해 둔 것이 있었기에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드래곤의 레어 근처를 지나던 중에 갑자기 하얀 빛이 저를 덮쳐오면서 그곳까지 튕긴 것이거든요. 아마 드래곤의 영향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랬던가. 마법의 체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니 마법사들의 조언이라도 구해 봐야겠군.”

닌슈르는 아젤의 말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럼 그대 말고는 함께 떨어진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레어 근처를 지나고 있던 거였나?”
“그렇죠.”
“자고로 드래곤의 레어 주변에는 드래곤에게 지배되어 있는 몬스터들이 둥지를 틀고 있으니, 그 틈을 헤쳐 나올 정도면 꽤나 대단한 검사겠군.”
“하하…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제 몸을 조금 지킬 정돕니다.”

쑥스러운 것처럼 머리를 가볍게 손을 저으며 제 딴에는 겸손을 표한 아젤이었지만 닌슈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실력은 별 것 아니라는 거군? 그 외에 다른 특기는 없나? 노래라든가, 시를 잘 쓴다든가, 요리에 능하다든가. 하다못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서 잘 말 한다든가.”

이제 와서 사실은 저 소드 마스터입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젤은 황제가 말한 조건과 자신이 맞는 게 있는 지 곰곰이 생각했다. 노래? 음치다. 시? 감성 따위 없다. 요리? 먹는 건 좋아하지만 특기라고 할 만큼은 안 된다. 이야기? 주문이라면 얼마든지 길게 낭송할 수 있지. 아젤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닌슈르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특기가 아무것도 없어?”

제일 특기라면 마법이고 그 다음이라면 검술.

“없는 것 같은데요.”

황제는 한숨을 쉬었고, 한심하다는 눈길에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누군가의 익숙한 모습을 발견한 아젤은 흠칫했다.

“그 나이 먹도록 도대체 뭘 했나?”
“…….”

사람 여럿 박살냈고, 나라도 하나 멸망시키긴 했습니다만. 며칠 전에는 드래곤 로드의 복장을 뒤집어 놓아 발에 차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지요.

“그렇다면 별 수 없군. 짐의 시종 겸 대화상대로 곁에 있도록 해라, 아젤.”
“예에? 시종이라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의 뜻이지. 뭐겠는가.”

닌슈르는 아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대가 옆에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
“…….”
“…….”
“…그래서요?”
“그래서 시종으로 있으란 말이 아니겠는가. 아, 물론 짐의 대화상대도 겸해서 말이지.”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겁니까아!”
“별 수 없지 않나. 할 수 있다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한 것은 그대야.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황실 마법사로, 검에 능하다면 호위 기사로, 노래를 잘 한다면 음유시인으로 곁에 두려 하였으나, 그 중 어떤 것에도 능숙하지 못하다 하니 시종으로써 곁에 둘 수 밖에.”

아젤은 지금이라도 저 사실은 마법과 검술 잘 하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키지 않는가? 싫다면 짐도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어.”

황제가 평민에게 -전직 암살범이라는 혐의도 받고 있는- 무려 제의라는 것을 건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아젤은 잠시 생각을 마치고 닌슈르에게 질문했다.

“밥 잘 나옵니까?”
“그거야 물론이지.”
“많이 바쁘지는 않구요?”
“시종이 그대 혼자뿐인 것은 아니니, 적당히 지낼 수 있을 거야. 정 뭣하다면 내 특별히 시종장에게 일러두도록 하지. 어차피 주된 일은 짐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함께 노닥거리는 정도가 되겠지만.”

닌슈르는 그의 질문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예에… 뭐, 그러면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으니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는데 그걸 거부할 리가 없는 아젤은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제안을 승낙했고 닌슈르는 크게 기꺼워했다.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게 되겠군.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아젤.”
“뜻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섬기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내 몸이 편하다는 전제 조건 하에서, 속으로 냉큼 조건을 덧붙였지만 그것 까지는 알지 못하는 닌슈르는 만족해했다. 그는 바로 지금, 단순히 안락한 직장만을 조건으로 내걸어 과거의 그 어떤 황제도, 왕도 감히 바랐지만 결코 이루지 못했던 대마도사 아젤라이다를 수하에 두는 쾌거를 이루었다.

…본인은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사소한 사실은 차치하고.





+) 황제수에 삘 꽂혀 버렸지 말입니다. 황제수가 드무니 제가 써야졈. 별 수 있나염. 단문 24제에 맞춰서 먼치킨물로 무뇌하게 되는대로 손가락 가는대로 쓰는대로 나갑니다. 지금도 길게 쓰려니 귀찮아서 상황 흘러가는 것도 설렁설렁 짧게-_-;
....근데 황제수라고 해봤자 배드인까지 갈 수 있기나 할까. 대충 결말 정도는 생각해 두었지만..끄응
참고로 책 제목은 우리의 활력소 마유땅의 만화책 제목입니다. 도용 ㅈㅅ
글 제목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겠습니다. 정 안 되면 Mors Sola로 한다거나 <-야

아젤라이다
: 수백 살이나 먹은 주제에 항상 2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발칙한 대마도사. 오래 살다 보니 심심해서 검술을 익힌 것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 순전히 비원랑의 먼치킨에 대한 욕구를 위해서 만들어진 캐릭터. 하지만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의욕도 거의 없고, 매우 둔감하고 나태하다

리샬 닌슈르 쿤 베르덴뷔트
: 제국의 황제. 늘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바쁘며 알고 보면 매우 유능하신 황제 폐하. 하지만 땡땡이치는 실력도 수준급. 이혼한 전 황후와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를 두고 있으며 현재는 홀몸. 절륜

카르제니하이아스
: 어쩌다 보니 아젤라이다를 거둬들이게 된 드래곤 로드. 그를 매우 귀찮아 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젤라이다가 젠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티는 안 낸다.

이름이 (제 기준으로)존나 길어서 다 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좀 틀려도 눈 감아 주셔요 <-
황제 말투 되게 애매하군요. 대놓고 하게체를 쓰자니 좀 어울리지 않고 --;

수정은 이따가 (...) 지금은 배가 고파서 (....)

by 비원랑 | 2006/07/25 11:43 | 무모한 도전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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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흑무휘無輝 at 2006/07/25 12:59
아니, 아니, 아니!! 아젤*로드 커플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무, 물론 황제수도 꽤나 땅기긴 하지만.... 훗훗훗훗훗 <-님아, 진정 좀;;
Commented by Eliz at 2006/07/25 13:04
귀엽네요ㅎㅎ
Commented by 이르펜 at 2006/07/25 13:24
우왓우왓 +ㅂ+ 재밌어요!!!
뒷내용이 마구마구 기대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D-cat at 2006/07/25 21:01
ㅎㅎㅎ커플링 기대하겠습니다*.*(사실 이걸 노리고 있는 듯)
Commented by 류크레온 at 2006/07/26 23:01
헉..황제수!!!+_+ 그 힘들다는 황제수군요!!..그나저나 전 참 공수구분 못하나봅니다. 왜 전 황제님이 공이라고 생각했으려나요..허어어억
핫, 그러고보니 비원랑님 이글루에 재복귀(?)하였습니다. 일은 대충 (완벽히는 아니고;;) 마무리 되었으나 요 며칠 못 본 소설들의 늪에 허우적 대느라..다시 성실 리플러가 될터이니 제발 버리지만 말아주십시...........ㅠ.ㅠ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6/07/27 00:19
흑무휘無輝/ 오옷. 그 커플도 괜찮겠지만, 글을 쓴 목적이 순전히 황제수에 대한 굶주림 때문이어서...orz 황제수가 너무 없더라구요 ;ㅁ;

Eliz/ 찌질한 것이 컨셉이었습니다 /ㅂ/ <-님

이르펜/ 앗. 감사합니다 >//< 게을러서 열심히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ㅂ; (사실 내용이 없...<-)

D-cat/ 에로까지 쓸 수 있을 지 모르겠..(야)

류크레온/ 황제수를 찾아봤는데 3, 4개 정도 밖에 못 본 것 같아요 orz 황제강(광)공이라면 진짜 많을 텐데..흑흑 ;ㅁ; ..으하하; 아니, 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저기서 황제가 공이 될 텐데 =ㅂ=;; 제 욕구가 황제수를 향해 있어서.. (튄다)
아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동안 많이 바쁘신 듯 하더니..^^ 다시 오셔서 기뻐요~♡ (냉큼 류크레온님 이글루로 달려갑니다 /ㅂ/)
Commented by 립본 at 2006/07/28 23:27
비원랑님, 재미있어요ㅜㅜ 이 커플 옆에서 지켜보는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대화하면 만담은 아닌데 뭔가 정상적인 코드에서 17도 정도 엇나가있는데, 본인들은 전~혀 모를 것 같고ㅜㅜㅜㅜ
계속 달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웃흥*-_-*
Commented by 펄슨 at 2006/07/29 11:09
ㅎㅇㅎㅇ황제수ㅠㅠㅠㅠㅠ 그것도 졸라짱센먼치킨에게 당하는 황제라니 어찌 이런 피토하는 자리를!! 다 다음을 기다립니다!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6/07/31 16:34
립본/ 아하하 ㅜㅜ 사실 지금 저지르고 있는 게(<-) 하나 있어서 황제 수는 끝까지 써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ㅂ;/// 뭔가 미묘한 구석이 있는 의미불명의 커플(...)을 쓰고 싶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ㅇ<-<

펄슨/ 졸라짱센먼치킨이 졸라 게을러서 제대로 될 지나 모르겠습니다 ㅠㅂㅠ;; 오로지 황제수에 대한 불타는 마음으로..!! (ㅌㅌㅌ)
Commented by 령하 at 2006/10/07 16:26
ㅠㅠㅠㅠ완전 귀여워요 정말!!!ㅠㅠ저 대마법사만 나오면 미치는데 아오ㅠㅠㅜㅠㅜㅠ 전 뭐 읽든지 간에 졸라짱쎈 먼치킨스러운 대마법사 진짜 좋아해요ㅠㅠㅠ그런데 어쩜 ㅠㅠㅠㅠ진짜 귀여워요!!!!! 게다가 황제수라니ㅠㅠㅜㅠㅜㅠ 정말 웃으면서(;;) 잘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련지 모르겠지만^^; 다음 편 열렬히 기다릴게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비원랑 at 2006/10/11 18:07
령하/ 꺄아 ㅠㅠㅠㅠㅠ 이 글에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플롯이고 뭐고 기승전결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 저도 졸라짱쎈먼치킨마법사에 환장합니다 ㅠㅠ!! 나도 먼치킨 좀 써보자! -라는 마인드 아래에 (..) 아젤은 졸라짱쎈마법사에다가 얼렁뚱땅 소드 마스터..으하하. 뒷편은 트윈홈(http://minority.gg.gg)에서 쓰고 있습니다만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서 안 쓴지가 어언....;ㅂ; 힘내겠습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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